한글이 이 세상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1446년에 간행된 『훈민정음(訓民正音)』에서였다. 한글이 창제된 것은 1443년(세종 25년)이었으나 이때는 이 새 문자의 기본적인 사항들, 즉 창제자가 세종이며 창제 시기는 세종 25년 음력 12월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것과 자모(字母)의 수가 28자라는 것 등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기록하여 알려 주었을 뿐 한글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한글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서인 『훈민정음』(새 문자 이름과 같아 이를 흔히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라 부른다)에서 한글 자모(字母)의 구체적인 모습이 비로소 체계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처음 『훈민정음』에 보인 한글의 모습은 대부분 오늘날의 것과 일치하지만 얼마간은 달랐다. 특히 오늘날의 ‘ㅏ, ㅗ, ㅓ, ㅜ' 및 ‘ㅑ, ㅛ, ㅕ, ㅠ'가 ‘ㅣㆍ, ㆍㅡ'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그러하다. 이것은 ‘ㅏ, ㅗ, ㅑ, ㅛ' 등을 제자(制字)할 때 ‘ㅣ'와 ‘ㆍ'를, 또는 ‘ㅡ'와 ‘ㆍ'를 좌우, 또는 상하에 하나, 또는 두 개 결합하여 만든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ㆍ'가 완전한 원형(圓形)으로 되어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그림 1 참조). 그리고 거의 모든 획들이 직선이면서 그 모서리가 원필(圓筆)로 되어 있는 것도 후대 문헌에서와는 달랐다. 그 결과 ‘ㄱ'이나 ‘ㅁ' 등 전체적으로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마디로 실용성보다는 하나의 교범(敎範)을 보이고자 함에 역점을 둔 서체(書體)였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의 이와 같은 서체는 1448년에 간행된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 한 번 더 쓰였을 뿐 이내 변화의 길을 걷는다. 1447년에 간행된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는 독자적인 모음으로서의 ‘ㆍ'의 동그라미 모습이나 획의 모서리 모습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ㅏ, ㅗ' 등에서 ‘ㆍ'의 동그라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다. 오늘날의 것과 같은 모습이 이미 이 무렵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月印釋譜)』부터는 ‘ㆍ'도 더 이상 동그라미 모양을 띠지 않게 되고 다른 획들도 모서리가 조금씩 사각(斜角)으로 바뀌면서 부드러워진다.
이 이후에도 계속 얼마간씩 변화를 겪지만 그것은 판본이 목판본인지 활자본인지, 활자본이라면 그 활자가 목활자인지 금속활자인지에 따라 그 특징에 맞춘 성격의 것이고 근본적인 변화라 할 것은 없다.
한글은 자모(字母)의 수에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창제 당시 28자라고 하였을 때는 ‘ㆍ', ‘ㅿ', ‘ㆆ' 등이 쓰였던 것인데 후세에 이것들이 쓰이지 않게 된 것이 그중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는 ‘아', ‘안' 등에 음가(音價) 없이 쓰이는 ‘ㅇ'과 ‘강', ‘풍' 등에 쓰이는 ‘ㆁ'이 구별되어 있었는데 이 구별도 곧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28자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순경음(脣輕音) ‘ㅸ'도 활발히 쓰였는데 이것도 이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자음(漢字音)을 표기하기 위해서 잠시 시험적으로 도입된 것이긴 하나 ‘ㅱ'도 쓰인 적이 있고 치음(齒音)을 ‘ㅅ, ㅈ, ㅊ'와 ‘ㅅ, ㅈ, ㅊ'로 구별하여 표기하기도 하였다.
또 된소리 표기로 각자병서(各自竝書)라고 부른 ‘ㄲ, ㄸ, ㅃ' 등이 그때에도 쓰이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아주 한정된 경우에만 쓰였고, 오늘날 된소리인 것들은 대개 ‘ㅺ', ‘ㅼ', ‘ㅽ'처럼 ‘ㅅ'을 결합한 이른바 합용병서(合用竝書)로 표기하였다. 합용병서에는 ‘ㅄ(?, ?)'처럼 ‘ㅂ'을 결합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ㅴ(?)'나 ‘ㅵ(?)'처럼 세 자음을 결합하는 예들도 있었다. ‘ㅆ'은 각자병서일 수도 있고 합용병서일 수 있는데 ‘ㅉ'은 합용병서로 해석될 자리에서도 ‘ㅾ'으로 쓰이는 일은 없었고 늘 ‘ㅉ'으로 표기되었다. ‘ㆅ'도 각자병서로만 쓰였고, 아주 제약된 자리에서만 쓰였지만 음가가 없는 ‘ㄴㅇ'의 각자병서인 ‘ㅥ, ㆀ'도 쓰였다.
우리 맞춤법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모아쓰기 방식이다. 즉 자모 하나씩을 일렬로 풀어 ‘ㄱㅏㅁ'이나 ‘ㅂㅓㄷㅡㄹ'처럼 표기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감'이나 ‘버들'처럼 음절(音節) 단위로 묶어 표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 모아쓰기 방식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부터 구상하였던 것으로, 오늘날 자음과 모음을 각각 초성(初聲)과 중성(中聲)이라 하고 받침을 종성(終聲)이라 불렀던 것도 모아쓰기를 전제로 한 이름들이고, 자음과 모음의 글자 모양을 완전히 다른 계열로 만들었던 것도 모아쓰기를 염두에 둔 조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ㅣ, ㅏ, ㅓ, ㅐ, ㅔ'처럼 ‘ㅣ'를 기본으로 하여 만든 것은 초성의 오른쪽에 쓰도록 하고 ‘ㅡ, ㅗ, ㅜ'처럼 ‘ㅡ'를 기본으로 하여 만든 글자 및 ‘ㆍ'는 초성의 아래쪽에 쓰도록 하였다.
모아쓰기 방식 외에서는 우리 맞춤법은 계속 변화를 겪어 왔고 또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한글 맞춤법』과 같은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뚜렷한 경향은 있었으나 정연하게 통일된 맞춤법이 지켜진 일은 없었고 심지어는 한 문헌 안에서도 서로 다른 맞춤법이 혼용되는 수도 많았다.
초기 문헌들의 맞춤법 중 오늘날의 맞춤법과 비교하여 가장 두드러지게 달랐던 점은 받침의 표기였다. 명사와 조사를 구분하여 ‘사?이, 집으로'처럼 표기하지 않고 ‘사?미, 지브로'처럼 받침을 내려 표기하였고, 용언의 경우도 어간과 어미를 구분하여 ‘남으시니, 늙은'처럼 표기하지 않고 ‘나므시니, 늘근'처럼 받침을 내려 표기하였다. 그리고 받침에 ‘ㅈ, ㅊ, ㅋ, ㅌ, ㅍ, ㅎ'을 쓰지 않도록 하여 ‘낯, 닢, 빛나니, 높고' 등을 ‘낫, 닙, 빗나니, 놉고' 등으로 표기하였다. 이른바 팔종성법(八終聲法)이라 하여 받침에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의 여덟 자만 쓰고 나머지는 이들 중의 어느 자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당시의 맞춤법은 소리나는 대로 적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는데 비록 후기로 오면서 조사와 어미 앞에서 받침을 올려 적는 이른바 분철(分綴) 표기가 많아지기는 하지만 이 발음 위주의 맞춤법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일된 맞춤법이 없이 혼란을 겪는 문자 생활이 20세기 초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한글이 계속 그 생명력을 이어오긴 하였으나 나라의 공문서며 중요한 저술들이 한문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한글로 영위되는 문자 생활의 비중이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개화기(開化期)를 맞아 한글이 비로소 공문(公文)에도 쓰이게 되고 학교도 세우고 교과서도 만들면서 통일된 맞춤법이 없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립하고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와 협의를 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모든 자음을 받침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는 아주 혁신적인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맞춤법의 골격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맞춤법은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빛을 못 보았는데 그러나 그 내용은 나중 조선총독부에서 1930년에 공포한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과 조선어학회에서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1933년 10월에 나라의 통일안으로 공포되었고 이로써 우리 맞춤법의 오랜 표류(漂流)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시대에 맞게 얼마간 손질하여 정부에서 1988년에 고시하여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한글 맞춤법』에 맞추어 새 한글 시대를 살고 있다.